- 아산경찰서 장재파출소 경위 박남수
112신고나 파출소로 직접 전화하여 접수되는 가정폭력 신고의 내용은 정말 다양하다. 폭력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 경찰관의 도움이 긴급하게 필요한 신고도 있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은 없었지만 오랜 기간 가정 내에서 쌓인 불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찰관에게 이를 호소하는 정도의 신고도 적지 않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상담소 및 보호시설에서 ‘상담·치료·회복프로그램’ 등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피해자 긴급구호를 위한 여성긴급전화 ☎1366, 무료법률 지원을 위한 대한법률구조공단 ☎132 등), 가정폭력 재발 우려 시 경찰관에게 퇴거·격리·접근금지 등의 긴급임시조치를 신청할 수 있다. 또한 가정폭력 형사절차와 별개로 직접 법원에 ‘피해자보호명령’을 청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가정폭력 신고의 경우, 피해자가 위와 같은 권리를 행사하거나 형사절차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낀다. 자녀의 존재로 인한 책임감, 가정이 극단적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그 이유이다. 어쩌면 이러한 가정에게 법적 절차보다 더 절실한 것은 가정 내 불화의 근본적인 해결일 것이다.
2015년 겨울 야간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파출소로 한 여성이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아직까지 물리적으로 폭행을 한 적은 없지만 곧 폭력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신과 아이들에게 무섭게 화를 낸다는 내용이었다.
신고자의 집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자녀 2명을 벽 앞에 세워두고 자신은 긴 막대기를 짚고 서서 훈계를 하는듯한 모습이었다. 경찰관이 남편의 퇴거·격리와 같은 긴급임시조치를 취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신고자는 도저히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새벽 1시에 자녀들을 데리고 스스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족들이 집을 나가자 남편은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는지 자신은 이제 집에서 약을 먹고 죽어버릴 작정이라고 무서운 말을 했다. 그대로 집을 떠날 수 없어 남편의 입장을 들어보고자 대화를 청하니, 남편은 그날 밤 처음 본 경찰관에게 무려 1시간 가까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자신이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자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해왔는데, 가정에서는 점점 자신이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도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보니 자녀들이 아버지를 기다리지도 않고 자고 있는 모습에 순간 울컥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또 남편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원래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겠냐며 가족들도 언젠가는 가장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남편을 진정시켰다.
집을 떠난 후에 신고자인 여성과 통화하여 남편과의 대화내용을 들려주자, 신고자도 좀 더 남편의 입장을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한번 경찰에 신고를 시작하면 반복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되는 상당수의 가정폭력·가정불화 신고와 달리 그 뒤로 그 집에서는 같은 내용의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정폭력 신고를 수차례 출동하고 여러 가정의 상황을 제3자의 처지에서 목격한 경찰관의 입장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찾는다면, 다소 진부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경청하는 것’을 권해보고 싶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는 다시 말다툼으로 변질되기 쉽지만, 위 사례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주장에 먼저 ‘당신 말이 맞아.’라는 태도를 (본심이 아니더라도)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크게 진정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가정폭력·가정불화 문제도 폭행·시비 등 일반적인 112신고들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면,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일삼던 한 가정의 남편과 긴 대화를 해본 결과, 폭력의 이유는 겨우 ‘집안이 지저분하다.’였다. 집에서 하루 종일 자녀와 함께 있으면서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남편이 단 하루만 체험해보거나 이해하
려 했다면 가정폭력까지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긴 명절 연휴를 막 마친 지금도 서로의 배우자가 어떠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나의 말 한마디에 어떠한 상처를 받았을지, 상대방에게 직접 들어보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속 작은 상처가 길고 험난한 가정불화로 확대되기 전에 슬기롭게 서로의 입장을 묻는 가정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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